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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11-29 23:18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063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김 선 욱(숭실대, 강사)


1. 서론

2. 정치와 합리성

3. 인간의 복수성과 판단력

4. 판단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5. 결론



1. 서론

정치란 무엇인가? 또 정치란 어떠해야 하는가? 이는 정치 철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두 질문이다. 대부분의 정치 철학은 정치에 있어서의 당위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이를 정치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예외 없이 정치의 가장 특정적인 부분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현상학적 태도를 가지고 정치 현상에서 시작하여 이론을 구성한다. 즉 정치의 특질을 명확히 파악하여 그 특성을 중심으로 정치 이론을 모색한다.

정치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정치는 인간의 다양성, 또는 복수성 (human plurality) 때문에 존재하는 공적 영역이라는 점이다. 종래의 정치 철학은 이성 개념을 핵심으로 사용하여 정치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아렌트는 이성적 접근, 도덕적 접근 등은 정치 영역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대안으로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의존한 판단이론을 제시한다.

아렌트는 정치 영역에 적용될 판단이론을 그의 주저 {정신의 삶}의 제3부에서 상론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저술은 그녀의 죽음으로 2부까지만 완성된 채 우리에게 남겨졌다. 다행히 그녀가 남긴 강의록이 제자의 손에 의해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판단이론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상론은 결여한 채로 였다.

상론을 요구하는 중요한 한 가지 문제는 아렌트가 제시하는 판단 이론과 이성과의 관계 문제이다. 과연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력이 이성의 작용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가라는 문제이다. 판단은 다른 사람에 의해 수용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며, 그에 따른 공동의 행위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므로, 판단은 어느 정도는 합리성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George E. McCarthy는 아렌트가 이성이나 합리성의 사용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으며 정치적 판단 이론을 이성 개념의 도입 없이 수립하려고 하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Lisa Jane Disch나 Margaret Canovan과 같은 이들은 판단 이론을 일종의 공적 이성(public reason)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등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아렌트의 판단 이론이 합리성 개념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라는 문제는, 우선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도구적 합리성 개념과의 관계에서 설명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해석학적으로 이해된 이성 개념, 특히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과의 관계에서도 설명되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일차적으로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파악의 독특성을 점검하고 여기에 대한 종래의 정치 철학의 이성적 접근법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 제시된 판단 이론의 특성을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판단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하여 하버마스의 이론에 대한 아렌트의 판단 이론의 특성을 결론적으로 드러내 보이겠다.

2. 정치와 합리성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공적인 문제의 해결이라고 대답한다면, 정치는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만 이해된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 영역을 이러한 수단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의 기본 조건은 인간 활동의 여러 차원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체의 유지를 위한 신진대사에 필요한 소비의 대상을 마련하는 활동이 있는가 하면, 의복이나 집처럼 보다 항구적인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활동이 있다. 또한 자신의 모습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며 자신의 개성을 알리려는 활동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활동을 각각 노동, 작업, 행위라고 부른다. 노동의 산물은 즉각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지만 작업의 산물은 보다 항구적인 특성을 갖는다. 반면 행위는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연관된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인간적 삶의 조건과 연결되는데, 특히 행위(action)가 인간의 정치 행위의 핵심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정치 행위는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공적 영역은 정치 영역과 사회 영역으로 구분된다. 사회 영역은 올바른 척도가 존재하며 그 척도에 따라 평가하고 우열을 매기는 것이 가능한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인간의 복수성이 인정될 필요가 없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경제이다. 반면 정치 영역은 인간의 행위가 바탕을 둔 복수성, 또는 다양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 다양성을 재단할 수 있는 단일한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정치 영역에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과의 공동의 생활을 유지한다. 이런 이유에서 아렌트는 "정의(定義)상, 언어(speech)의 적절한 기능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문제가 항상 정치적이 된다. 왜냐하면 언어가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복수성, 또는 다양성에 대한 억압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는 인간의 삶의 기본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러한 정치의 근본적 특성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한다. 서양에서 정치 철학은 플라톤에게서 시작된다. 플라톤의 정치 철학의 형성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사형집행 이후의 일이다. 결백한 자기 스승을 사형에 처한 사태에 실망한 플라톤은 "설득"의 방법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설득이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사형선고를 피할 수 없었다. 설득(peithein)이란 강압에 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아주 정치적인 형태의 언어사용을 의미한다. 또 설득은 서로 다른 여러 의견(또는 억견, doxa)의 존재를 전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의 의견에 자기 자신의 의견을 대립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을 진리로서 주장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억견을 교정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실패 때문에 플라톤은 의견의 기능과 그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인 설득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인간의 행동이 판단되어질 수 있고 생각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게 해줄 어떤 절대적 기준을 철학의 영역에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정치 영역은 항상 변화하는 상대적인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 영역에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던 플라톤은 정치철학이 바로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진리를 아는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는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의견들이 경쟁하는 정치 영역을 염두에 두었던 반면, 플라톤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 아래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재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폴리스의 형태에 대하여 생각했을 때 이를 단지 철학자의 관점에서만 설명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도시국가 안에서 철학자가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식은 바로 정신이 다른 신체의 부분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마치 정신이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갈등을 해소함에 있어서 절대적 권한을 가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그러한 절대권을 국가 내에서 가져야 한다. 철학자가 국가 내에서 정치가로서 해야할 책무는 "인간사의 영역에 준거들(standards)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준거들은 절대적 진리에 기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철학적 이데아들이란 일시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선한 것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선하다고 믿게 하려면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란 가사적 인간의 유한한 설명능력이나 해명과 무관하게 완전히 수용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진리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도입할 때 설득의 과정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플라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이지만) 진리는 언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인 철학은 경이(thaumadzein)와 더불어 시작하는데, 경이란 말이 없게되고 모든 동작을 멈춘, 놀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사유가 시작되는 것은 경이(thaumadzein)와 사념(doxadzein), 이 두 가지를 통해서이다. 경이란 철학적 사유를 개시하며 모든 언어 활동이 종료된 채 진리를 관조하면서 끝이 난다. 사념이란 사태에 대한 의견(또는 억견, doxa)을 형성하여 다른 사람과 이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볼 때 경이와 사념은 서로 대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경이에는 언어가 진리 발견에 있어서 수단적일 뿐이지만 사념에는 언어의 지속적 사용이 요구된다. 이는 다른 말로, 철학적 진리란 언어사용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한편, 의견은 언어의 계속적 사용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진리와 의견의 차이점을 파악한 플라톤은 경의의 경험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대하려 했다. 즉 단순히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독단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플라톤은 의견을 비판하고, 진리 추구의 정신을 정치 영역으로 도입하였던 것이다. 플라톤에 의해 철학적 관조의 삶(bios the?r?tikos)이 정치 영역에서도 수립되었다.

관조의 삶(bios the?r?tikos 또는 vita contemplativa)은 철학적 사유에 몰두한 삶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은 관조를 통해서만 인간이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관조적 삶이라는 세 가지 삶의 형태 중에서 관조적 삶을 최고로 생각한 이유는, 관조(theoria)를 통해서만 인간의 가장 고유한 기능인 이성이 작용하여 인간을 행복(또는 번영, eudaimonia)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조란 삶의 필요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의 획득을 위해서는 의견(또는 억견)의 중지, 정치적 활동의 중지(skhol?)도 포함한다. 이때 skhol?는 "고요", "정적"을 의미하는 말로서 영어의 학자(scholar)나 학문(scholarship)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우리는 모든 근심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때 고요한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관조란 마음의 절대적인 정적(靜寂)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모든 인간의 활동은 비정적(a-skholia)의 상태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정적과 비정적 상태의 관계를 전쟁과 평화의 관계에 비유하여, "전쟁이 평화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모든 활동, 심지어 단순한 사고의 과정까지도 관조라는 절대적 정적 상태로 귀결되게 된다"라고 말한다. 즉 고요함을 방해하는 행동들이 중지되는 것은 고요한 관조가 등장할 때라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의 예가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최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나 심지어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관조의 능력, 즉 이성(no?s)이다. 이렇게 볼 때,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대한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우위뿐만 아니라, 양자의 공존불가능성도 분명해 진다. 즉 그들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공존 불가능성에 대한 분석은,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경험과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경험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처럼 철학과 정치가 양립불가능 하다면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정치철학이란, 서로 공존 불가능한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정치적 경험의 고유한 특성을 적절히 간취하지 못하게 되는 잘못된 시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치 철학 일반, 즉 정치에 대한 철학적 접근 일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이다

정치 영역에 철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의견의 복수성 및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복수성의 파괴이다. 이렇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설득"의 역할을 부정하는 "절대적 준거"의 정치 영역에로의 도입에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행동은 이러한 준거와 척도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복수성은 더 이상 존중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플라톤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국가 형태를 설명하는 철학적 이념은 설득이나 합의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이 바로 정치 현실에로 적용이 되고 부과된다. 이때 정치 행위란 철학이 부과한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만 유용하게 되며 따라서 더 이상 개인의 특수성이나 개성, 나아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행위로서의 의미는 가지지 않게 된다. 인간의 복수성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철학적 이념이 정치 영역에로 부과될 때 이때 사용되는 언어의 특성은 변화된다. 즉 언어는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지 않게 되고 단지 주어진 철학적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이것을 아렌트의 표현으로 하자면, 언어적 행위(action)가 단순한 기능적 작업(work)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제작자가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제작 과정을 통하여 물건 또는 작품으로 실현되어 나타나듯, 철학적 이념도 또한 언어와 행동을 통해 현실 가운데 실현되게 된다. 따라서 아렌트는 "행위를 제작으로 대체하고 이와 더불어 정치를 소위 '고차적'인 목적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 정치 철학의 전통만큼 오래된 것이다"고 말한다.

언어가 철학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질 때 그 언어는 논리적 기능과 작용이 핵심을 차지한다. 논증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진리를 얻는 과정에서는 언어가 사용되어지지만 진리의 획득과 더불어 언어의 사용은 중지된다. 이러한 철학적 이념은 "이성적 진리"라고 하기도 하고 또 "이성적으로 참된 명제"라고도 불린다.

정치 영역에서 언어는 설득을 목표로 사용되며 개성을 드러낸다. 설득은 타자와의 의견의 일치와 합의를 목표로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의 탐구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진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적 논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논증 과정에서 언어는 주장된 참인 명제를 다른 사람이 수용하도록 설득할 필요는 없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법정을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한 사건이 의미하듯, 참되고 필연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관없이 참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렌트는 진리가 독재적, 또는 폭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수학적 진리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와 자연과학적 진리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 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진리들은 그것을 찾는 방법은 모두 다르지만, 일단 이것이 진리로 인정된 다음에는 모두 "동의와 논박, 또는 합의를 초월"한다. 이때 참된 의미에 있어서 설득이나 토론은 불필요하고 무용하다. 왜냐하면 진리란 설득이나 토론이 어떤 결과를 낳든 상관없이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적 진리와 윤리적 진리 ("나쁜 짓을 하기보다는 나쁜 짓을 당하는 편이 낫다")도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바로 이 점이 정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의 문제점을 설명해 준다.

정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정치 철학적 사고는 서양의 정치철학 전체로 이어졌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사상도 이와 같은 강제적 성격을 가진 진리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아렌트는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철학적 태도를 가지고 정치 문제에 접근할 때는 항상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태도에 내재된 정신적 기능은 다름 아닌 이성이다. 이때의 이성은 궁극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고, 철학적 이념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도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설명되는 이성과 합리성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목적 합리성 개념이나 조지 E. 맥카시가 말하는 기술적 합리성 개념,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말하는 도구적 합리성 개념으로 설명하려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아렌트가 지적한 정치 영역 내에서의 철학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의 이성이나 합리성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다.이성은 정치 영역에서 의견의 복수성을 파괴토록 기능할 것이고, 나아가 인간의 기본 조건인 복수성의 파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3. 인간의 복수성과 판단력

임마누엘 칸트는 비록 정치 철학과 관련된 몇 가지 작은 글들을 남겼으나 본격적인 저술은 남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가 자신의 정치 사상을 위하여 칸트에게 의존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렌트가 정치 철학 자체를 거부했던 것은 앞서 살펴 본대로 정치 영역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영역과 같은 특성을 칸트도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아렌트는 파악한다. 다만 칸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적절한 정신적 기능에 대해 {판단력 비판}, 특히 제1부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아렌트는 발견했다.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취미 판단에 대한 부분에서 자신의 정치 사상을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렌트가 정치 문제를 다루는 정신 기능으로 생각한 것은 판단력인데, 판단력은 취미의 작용 가운데 칸트가 발견한 정신 기능이다. 취미는 18세기에 많이 다루어진 철학적, 또는 미학적 주제였는데, 비판기 이전의 칸트는 도덕의 문제도 취미의 문제로 간주했으나 비판적 검토의 과정을 거치면서 도덕은 이성만의 작업으로 여기게 되었고, 취미 또는 판단력은 미추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만 생각하게 되었다. {판단력 비판}의 특징은 여기서 다루어지는 인간의 모습이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에서처럼 지적 존재나 인식적 존재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책에서는 특수한 맥락에 속하는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진리"라는 말이 등장하지도 않는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특히 취미 판단과 관련된 부분에서 전제된 인간의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 가운데 살고 있는, 복수의 인간"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력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상에 사는 인간들에게만 타당성이 제한된다. 아렌트가 정치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판단력이 다루는 대상은 우연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별자이다. 또한 복수적 인간의 상호 관계와 연관되는 "사교성"(sociability)도 판단력 비판의 1부에서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판단력 비판}은 아렌트가 그녀의 독특한 정치 개념과 더불어 중요한 개별자, 개별자를 다루는 정신 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사교성 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렌트로서는 자신의 정치 사상을 배양시킬 더없이 좋은 장소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칸트의 정치 철학을 이끌어 낼 장소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실천이성비판}을 아렌트가 고려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도덕 철학은 정치와 관련되는 국가조직의 문제에 대하여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가 정치 문제로 생각했던 것은 {영구평화론}에서 언급이 되듯, 사람들이 도덕적이지 않고서도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는 도덕성에서 좋은 헌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좋은 헌법아래에서 만이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도덕은 개인적인 행위에 국한되지만 정치는 공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철학의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던 두 번째 문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정치적 행위나 사교적 행위의 문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타인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자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도덕적 의무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인간의 복수성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설명된다. {실천이성비판}이 다루는 인간의 모습은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칸트 자신이 말하듯이, 지상의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에 있는 어떤 존재도 이성적인 존재인 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도덕적 명령이 찾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렌트는 실천이성의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판단력에서 정치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정치적 판단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반적인 소통가능성을 갖는 판단이다. 이때의 판단은, 당면한 개별 사태를 어떤 기존에 알고있는 보편적인 원리에 적용함으로서 판단을 이끌어 내는 규정적 판단력의 작용이 아니라, 보편적 원리를 전제하지 않고 "개별자를 개별자 자체로서" 다루는 반성적 판단력의 작용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용어, 즉 의식 철학적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판단력의 작용을 설명한다. 판단은 상상력(imagination)과 반성(reflection)이라는 두 가지 정신적 작용을 통해 산출된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경험한 내용은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내적 감각인 취미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로 산출된다. 이미지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상상력은 외부의 사물에서 오는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객관성을 갖게 해 준다. 반성은 바로 내적 감각인 취미의 작용이다. 취미는 쾌와 불쾌라는 기준에 따라서 평가를 내리게 되는데, 이는 사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가능성(communicability)과 연관되어 있다. 소통가능성이란 "누구나 다 나와 같을 것이다"라는 느낌의 바탕이 된다. 즉 취미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통적이라는 느낌에 바탕을 둔다는 말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각을 공통 감각(common sense, Gemeinsinn)이라고 하는데, 이는 영어로는 상식이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상식에는 다소 부정적 의미도 있지만 아렌트는 공통 감각을 상식과 동일한 단어로 사용함으로서 상식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에 주목한다. 물론 이 공통 감각을 칸트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에 어울리게 해주는…별개의 감각"을 의미한다. 이 공통감이 판단의 소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의사소통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 주는 것이다.

이 공통감이 소통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떤 근거를 통해서 인가? 이 문제는 정치적 판단이 이성적 판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아렌트는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소통가능성을 획득하게 되는가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을 정리함으로써 해석해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정치 영역과 연관하여 아렌트가 강조하는, 칸트의 사교성 개념과도 연결된다. 지상의 인간은 복수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필요로 한다. 소통가능성 자체도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대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설명하기"(????? ???????)란 증명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어떤 의견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또 거기에 대해 합의를 이루며 나아가 공동의 행위를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타인의 말을 실제로 들어보고 타인의 관점을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관점에만 경도 되지 않게 되어,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타인의 관점을 고려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마음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만이 확장된 사고(enlarged thought)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넘어서게 해주는 것은 또한 상상력(imagination)의 작용이다. 사고의 확장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조건, 즉 사적 이해관계(self-interest)를 뛰어 넘어 사고의 일반성을 획득하게 된다. 사적 이해관심이란 자신의 제한된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인데, 이는 또한 사용가치(usefulness)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넘어설 때,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이 획득될 수 있다. 무관심성이란 사적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적 관심에서 벗어남으로써 무관심성을 획득하는 것, 확장된 심성으로서 확장된 사고를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이 판단의 의사소통 가능성을 가능하게 한다. 사고가 더욱 넓게 확장되면 될수록, 판단은 더욱 일반화될 수 있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넓게 생각하는 폭은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은 칸트의 것이지만, 시민의 개념에는 책임, 권리, 의무 등이 수반되기 때문에 아렌트는 이를 세계 관찰자(Weltbetrachter)의 개념으로 해석한다. 세계적 관점을 가짐으로서 우리는 가장 폭넓은 소통가능성을 가진 판단을 형성할 수 있게된다는 말이다. 이로써,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인간의 정신의 기능을 설명하는 판단 이론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관찰자, 그것도 세계적 관점을 가진 관찰자의 입장에 대한 설명으로 나아간다.

판단자는 관찰자이다. 관찰자는 구체적 행위에 참여(participation, to take part in)하지 않음으로써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을 획득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는 사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전체를 볼 수 있다. 행위자(actor)는 마치 연극의 배우(actor)처럼 구체적 사태에 관련되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없으며, 관객(spectator)의 반응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명성(fame)에 관심이 쏠린 행위자는 관찰자의 의견(opinion)에 좌우된다. fame과 opinion은 모두 그리스어 doxa의 번역어가 된다. 따라서 관찰자는 행위자의 마음속에 앉아 있다. 이때 행위자는 관찰자에 의존적이며, 관찰자는 자율적이다. 이러한 관찰자에 대한 설명은 아렌트만의 독특한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철학사에서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것으로 전해지는 올림픽 게임의 예에 나오는 관찰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들도 벽에 비친 그림자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자와는 달리 아렌트의 관찰자는 복수로서 존재하며 또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로 설명되는 것이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사슬에 묶여 서로 보지 못하는 동굴의 죄수나 올림픽 게임의 관찰자와는 달리 아렌트의 관찰자는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관여하고, 대화를 나누며, 소통한다. 또한 이런 대화를 나눔으로써 관찰자는 세계적인 관점으로까지 자신의 관점을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 관찰자는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른 인간들을 그 특수성에 입각하여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이러한 특수성 가운데 보편적 이념이 있음을 상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판단 가운데 개별자는 일반자와 "신비하게"(mysteriously) 연결된다는 것이다.


4. 판단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앞 절에서 살펴본 대로 아렌트는 판단 이론을 통해 이성의 작용에 의존하지 않은 채 정치 문제를 다루는 정신 능력을 설명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치 이론을 구성해 간다. 여기서 아렌트가 분명히 하는 것은 정치 문제에 대한 목적 합리성의 작용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논리적 작용에 언어의 기능을 전적으로 맡기는 태도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렌트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합리성 개념, 즉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 하버마스는 계몽적 이성의 도구성을 비판하면서 이 문제점을 해결한 새로운 이성 이해의 지평을 연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대화 참가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어떻게 가능하며, 나아가 억압이 배제된 대화를 통해 상호 행위를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바탕에서 하버마스는 새로이 정치, 사회, 윤리, 법 등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을 열어간다. 아렌트의 판단 이론에 있어서 소통가능성(communicability)이 핵심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 판단 이론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여전히 배제하는가, 아니면 포함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먼저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의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계몽과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의 합리성 개념이 역설적으로 인간성을 억압하고 굴레에 매이게 만들어 버리는 계몽의 변증법을 파악하여 근대의 이성 개념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것에 반해, 하버마스는 이성 개념이 아직도 불충분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성이 가지고 있는 의사소통적 힘에 주목한다. 도구적 이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의식철학의 패러다임 때문에 불가피하게 갖게되는 객관화의 태도(objectifying attitude)에 있다. 즉 인식 주체가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인식과 행위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타자와의 동등한 관계에 기초한 소통적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없다. 이성이 가지고 있는 소통적 힘이 적절히 드러나기 위해서 하버마스는 언어 철학을 이용하여 이성 개념을 새로이 해석한다. 보편화용론을 중심으로 이성의 작용을 분석해낸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은 상호이해(Verständigung)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며, 강요성이 배제된 언어의 사용을 통해 대화 참여자들이 합리적 합의를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를 설명한다. 이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주관성까지 설명 가능해 진다.

이상과 같은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이 과연 아렌트의 판단 이론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최소한 두 가지의 근거가 있다. 먼저,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적 행위자, 즉 판단을 내리는 자는 판단을 통해 타인의 동의를 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 가운데 논리적 기능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정합성은 지녀야 할 것이다. 나아가 판단이 다루고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한 타당성 주장이 동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편, 아렌트는 판단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로서 공통감(sensus communis) 개념을 이용하지만, 이는 의식 철학적 개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의문시하여 언어철학적으로 검토한다면, 인간에게 출생 후부터 이루어지는 언어 학습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과의 상호관계들 속에서 언어의 학습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인간은 사회화되어 간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을 설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아렌트가 판단 이론에서 소통 가능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이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작용을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즉 아렌트의 판단 이론이 하버마스의 이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렌트의 판단 이론이 의식 철학의 언어로 기술된 것을 언어 철학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과연 아렌트의 판단 이론 가운데 새로운 것이 남게 되는가 라는 문제제기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벨머(Albrecht Wellmer)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아렌트가 의식 철학적 개념 틀 안에서 판단 이론을 형성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점은 판단의 형성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고 신화적으로 설명된다는 점이라고 벨머는 지적한다.


정치적 도덕적 판단의 문제를 칸트의 실천 철학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미학적 판단의 문제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 (아렌트의) 시도는 판단의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판단의 신화라고 한 이유는 판단의 기능이, 진리 주장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논증이 제시되지 않는 가운데 진리를 만나게 된다는 다소 신화적인 기능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벨머는 아렌트가 진리를 위해 판단이론을 제시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데,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진리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간주했다. 물론 우리는, 판단이 다른 사람에 의해 상호주관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때 이를 진리라고 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은 결국 하버마스적 의미에 있어서 합리적인 것이며, 판단의 타당성은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아렌트의 판단 이론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하버마스의 정치, 사회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아렌트의 판단 이론은 처음부터 그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하버마스의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 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다양상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아렌트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의 특성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며,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둔 그녀의 정치 개념은 이런 점에서 그녀의 정치 사상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 된다. 반면 하버마스는 사회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양성이나 특수성은 절차성에 중점을 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작용 가운데 적절히 용해되기를 바란다. 즉 개성적 측면도 대화의 장에서는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판단은 논리적 기능이 아니라 공통감에 대한 호소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작용은 "설명하기"(????? ???????)로서 개성 표출에 더욱 큰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복수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러한 설명하기를 언급하는 아렌트의 의도는 정치 영역에서는 인간들의 서로 다른 모습이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그러한 차이가 오히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소통 가능성을 핵심으로 하는 판단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이상의 분석으로 충분히 지적될 수 있지만, 특수성을 강조하는 판단 이론의 지향점의 근본적 특성은 하버마스의 이론이 핵심으로 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5. 결론


아렌트의 판단 이론의 특수성, 복수성 지향의 특성은 하버마스의 정치 이론과 대조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제에서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첫째는, 정치적 공동행위(action in concert)가 설명되는 연대성(solidarity) 개념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판단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공동의 행위를 유발하게 된다. 하버마스의 경우, 연대성은 공동의 관심에 대한 합리적 합의를 하는 가운데 형성된다고 하지만, 아렌트는 연대성이 보다 근본적인 개인에 대한 인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판단은 개인의 특수성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판단의 수용을 의미하는 인정 행위는, 판단이 다양성과 차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인정에 바탕을 둔 공동 행위는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권력의 가장 일차적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아렌트의 판단 이론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과, 양자의 지향점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양자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중요성이 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우리의 시대 인식을 가질 때, 문화의 문제를 다룰 효과적인 접근법을 우리는 하버마스보다는 아렌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문화의 핵심은 서로 다르면서도, 또한 소통가능성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판단은 서로 다름이 있음으로서 형성되는 복수성을 특성으로 하면서, 그 다름을 다름 자체로서 평가할 수 있는 기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판단 이론은 문화와 연관하여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아렌트 자신은 문화 개념과 판단 이론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 차이가 중요할 수 있는 국제 관계의 문제는 정치의 핵심적 문제로 생각한 바 있다. 정치 사상적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아렌트가 정치 사상을 전개했던 것처럼, 그녀의 판단 이론에서 문화적 접근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의 판단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논평


김 석 수(서경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아렌트가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공적 공간의 확립과 관련하여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도입한 입장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아렌트가 근거로 하는 판단력이 합리성(도구적 합리성/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밝히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우선 필자는 인간의 삶의 두 가지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련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이 복수성, 다원성에 근거한 '행위'의 영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조건』(1958)에서 논의된 것으로, 인간의 삶의 조건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사물적 관계(측정하는 관계)를 넘어 말하고 행위하는 대화의 공간으로서 복수성과 다원성이 살아 있도록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 역시 아렌트가 언어를 넘어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추상적인 보편주의적 태도보다는 산파술을 통하여 끊임없이 다양한 의견과 설득 사이에 추구되는 언어적 긴장 관계를 중시한다. 즉 아렌트는 동굴을 떠난 태양중심주의 속에 담겨 있는 관조적 폭력을 비판하면서 동굴 속의 다수의 의견이 함께 하는 정치적 판단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개념의 박물관'을 해체하고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를 선포하면서 '오해가 이해를 낳는다'고 주장한 니체의 전략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고, '이해는 역사적이다'는 해석학적 전통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아렌트는 언어를 넘어선 관조적인 철학적 태도를 통하여 정치적 영역을 독식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폭력성을 간파하고 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현실의 복수성, 다원성에 관계하는 정치성과 관조의 단일성에 관계하는 철학의 통합을 부정한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에는 '작업'에서처럼 언어를 도구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관조'에서처럼 언어를 거부하는 세계도 부정한다. 따라서 아렌트가 주장하는 행위의 정치적 영역에서의 언어적 설득은 논리적 공통감(sensus communis logicus)이 아니라 미감적 공통감(sensus communis aestheticus)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잡아 쥔다(greifen)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Begriff)적 작업이 아니라 옆에(bei) 함께 걸어가는(treten) 참여(Beitritt)적 작업이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이성의 논리적 작업이나 합리적 작업을 통하여 진리를 주장하는 것 속에 담겨 있는 전체주의적 테러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료타르나 데리다가 진리와 정의를 통합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면과 일맥 상통한다.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칸트의 취미판단에서 주장되는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확장된 마음'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까지 나아가는 관찰자적 태도이다. 물론 이 때의 관찰자는 일방적으로 감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상호 대화에 참여하여 의사소통하는 관찰자다. 이런 관찰자적 태도는 행위가 유발할 수 있는 무모함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어는 고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주장되는 관조적 차원의 제어가 아니라 현실의 다수가 사회성을 근거로 상호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제어이다(*사유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 것은 근본악이다).

아렌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목적 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상호성과 언어적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반성적 판단력에 바탕을 둔 정치성과는 정반대 된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 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다양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점"(13쪽) 때문이다.


2. 문제 제기


이상의 필자의 이해에 대해서 평자 역시 대체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이 글 속에서 아직 도 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평자는 이 부분을 제시함으로써 필자의 글이 좀 더 선명해지기를 기대한다.

(1) 이 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즉 반성적 판단력과 합리성의 관계이다. 이 문제는 또한 현대 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던 하버마스와 리요타르의 논쟁 속에 담겨 있는 갈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 논쟁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 같이 복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성과 차이성, 공약성과 불가공약성, 합리성과 반합리성을 축으로 대립하고 있다. 전자는 결국 의사소통공동체의 구성원인 언어행위자의 주체적 참여를 통하여 복수성 속에 자리하고 있는 차이성, 불가공약성, 반합리성이 반사회성으로 이탈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불안의 요소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향해 있다면, 후자는 복수성에 내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기 위해 동일성, 공약성, 합리성을 도모하다보면 결국 기형적인 근대가 초래한 도구적 합리성에 다시 봉착하기 때문에 차이성을 풀어주고 열어주는 쪽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리요타르는 진리와 정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필자의 논의에 따르면 분명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기보다는 리요타르적이다. 특히 '탄생성'을 강조하고, '출현성'(현상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더 더욱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리요타르와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로 볼 수 있는가? 리요타르나 데리다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자신들의 불가공약성, 차연성 개념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들은 아렌트와는 달리 칸트의 공통감 보다는 숭고감을 더 중시한다(*물론 향수적nostelgia 숭고감이 아니라 혁신적novatio 숭고감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념이 다가갈 수 없는 차이성을 더 부각시키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주장과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이라고 하기에는 리요타르적이고, 리요타르적이라고 하기에는 하버마스적이다. 도대체 아렌트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분명히 아렌트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적 연대성보다는 공감적 연대성으로 향해 있다. 사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비극'을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유럽에 동화되지 않는 '패리아의 길'에 있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녀는 단순히 복수성과 다원성을 열어 주는 데만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실적 권력에 참여하여 결집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정치적인 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도 많은 관심이 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아렌트는 육체적 개체주의자도 아니고 정신적 보편주의자도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억지로 표현한다면 정신과 육체가 함께 하는 몸적 연대주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생활정치학' '몸의 정치학'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런 입장은 당연히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적 계기에 흡수되어 있는 "체계의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지화"를 거부하고 상호행위를 강조하는 하버마스적 공론장 확보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공론장은 '이성적 합리성'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미감적 공통감'에 바탕을 둔 담론의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적인 공적 영역은 합리성만으로 필요 충분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고 충분성을 확보하려면 무관심성에 바탕을 둔 느낌의 보편성, 미감적 보편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차이는 보편성으로 향하느냐, 차이성으로 향하느냐라는 문제보다는 합리성과 미감성에 대한 경중에 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지 않을까? 아렌트는 베버적인 목적 추구적인 합리성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버마스가 비판하듯이 목적 초월적인 면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2) 이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든, 더 근원적인 문제는 아렌트가 하버마스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하버마스와 정반대된다라는 필자의 주장에 있다. 아렌트의 철학 체계 내에서 개념성과 탈개념성, 합리성과 미감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나아가 필자가 벨머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듯이, 아렌트의 이런 입장이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즉 공통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감적 보편성으로서의 연대성이라는 논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 외재적 접근이 논리적 보편성을 결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3)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phronesis)와 어떻게 다른가? 그러니까 평자의 질문은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동일하게 본질주의자로 규정하고 결국에는 이론지가 실천지 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비판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이 아렌트의 판단 개념과 멀리 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가? 필자의 주장처럼 "관찰자는 사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전체를 볼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위해야 한다면 더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왜 칸트의 취미판단 부분에만 집중하여 자신의 정치철학을 확립하고자 하고, 숭고함이나 목적론적 판단력 쪽으로는 넘어가지 않는가? 아렌트는 칸트의 입장과 완전히 같은가? 같지 않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가?

(4) 필자는 아렌트의 이런 정치철학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정서적 공감주의와 합리적 이기주의가 야합된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처럼 비합리성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론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성적 합리성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아렌트의 주장은 너무 높은 이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