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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4-28 14:13
내 처녀시절을 돌아보며/박선자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82  
                                      내 처녀시절을 돌아보며   

                                                                                    박 선 자

 나는 가락에 살면서 여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셔서 많이 힘들었다. 아침밥을 해 먹고 10리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겨울엔 북풍을 받고 걷노라면 추워서 손은 시럽고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장갑도, 외투도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힘든 것들을 군대에서 고생하고 있는 오빠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삼고 살았다. 힘들 때마다 나는 위문편지를 써 보냈고 오빠는 격려의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오빠는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는 장남이라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할머니와 고모들의 성화에 병중에 있는 어머니를 두고 결국 사람을 정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키우며 포목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수준도 맞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장학사로 전근 발령을 받고 계셨다.
 며칠 뒤 아버지와 동생들은 새 식구와 함께 할머니 댁으로 들어가고 어머니와 나는 활천초등학교 옆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갑자기 쓸쓸한 생활이 시작되면서 고아가 된 것 같았다. 가끔 동생들이 엄마를 보러 오면 안 갈려고 운다. 떠밀어 보내놓고 나는 많이도 울었다. 새엄마를 얻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마음이 편하실까? 큰 동생은 서울대학법대에 합격해 서울로 떠났다.
 활천고개를 넘나들 때 어둠이 흐르면 그 어둠 속 불빛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를 그 때처럼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고아 마냥 눈물을 흘리면서 반년은 지났을까 새어머니도 할머니와 분가했다. 결국 아버지는 부모를 못 모시는 불효자가 되었다. 여동생 경자가 할머니 조석을 돌봤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부르셨다. 주촌초등학교에 출근하라 하셨다. 다음날 학교에 나갔다. 4학년을 맡게 되었다. 열심히 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활천고개를 넘고 외동고개를 넘고 또 내삼고개를 넘어 20리 길을 걸어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길은 자갈길이다. 버스도 없는 시절이었다. 6.25 사변 뒤라 여기저기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가끔 군인차가 태워 주기도 했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나를 잘 따라 주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갈수록 학교생활이 재미있었다. 운동회가 있는 가을엔 아이들을 운동회 연습 시키고 학교에서 퇴근하면 벌써 어둡다. 고개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무서웠든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가로등도, 인가도 없을 때다. 활천고개엔 탄약고가 있었는데 두 명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우리를 지키는 그 병사가 더 무서워 신발을 벗어들고 뛴다. 동네까지 와서야 신발을 신고 한숨 돌렸다. 집에 오면 9시.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도 나를 기다려 주는 어머니가 있어 나는 행복했는지 모른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어느 날, 나는 갑바 비옷을 입고 밀대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활천고개를 넘고 내동고개를 넘었다. 그 날 따라 잘도 태워 주던 군인 차들은 그냥 지나가 버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찍’ 짚차 한 대가 옆에 섰다. ‘혹여나’ 하고 밀짚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기까지는 남자로 보였든 것 같았다.
“어, 선생님이 빗길을 걷고 계셨네요. 어디까지 가세요? 태워 드릴께요”
 그래서 그 뒤엔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외가에서 자기도 했다. 그 얼마 뒤 아버지께서 학교 옆 사택으로 이사 시켜주었다. 이제는 깜깜한 밤길을 안 다녀도 되고 가슴 팔딱이며 고개를 뛰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4학년을 마치고 줄곧 1학년을 맡았다. 10리, 5리길을 걸어 학교에 오는 꼬마들. 글 한 자 모르고 학교에 입학한 꼬마들이 내가 가르쳐 준 한글을 줄줄 읽고 쓰는걸 보면서 가슴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운동회가 다가왔다. 그 시절 시골 운동회는 큰 행사였다. 전 면민이 다 모여 고구마와 밤을 삶고 찐쌀, 단감 그리고 떡도 해 온다.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손뼉치고 응원하며 아버지 어머니도 한바탕 뛴다. 어느 해 운동회 때 1, 2, 3학년에 고깔모자에 소복을 들고 춤추게 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고 4, 5, 6학년은 마스게임을 가르쳤는데 너무도 질서 있게 잘해 주어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에 따라 나는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많이 편찮아지셨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20일쯤 후 어머니는 42살의 나이로 세상 하직 하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잡아주시는 손을 잡고 그렇게 짧은 생을 마치셨다. 어머니를 잃은 슬픈 아픔은 오직 오빠와 주고 받는 편지로 이겨내었다.
 1년 상을 치룬 어느 날, 아버지께서 주촌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셨다. 나 역시 다시 주촌초등학교로 갔다. 아버지를 교장으로 모시고 근무했다. 그때 서울서 공부하던 동생이 사법고시 준비를 하느라 시골에 와 있었다.
 동생은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와 함께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 야간학교를 설립했다. 학생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 나도 한 몫 끼어 학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당시는 문맹퇴치를 외치는 시절이어서 마을을 다니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가면 모두들 너무너무 반가이 맞아주셨다. 가르친다는 보람에 고단함도 잊었다. 한글을 깨우치는 그들을 보면서 뿌듯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가끔 학부형의 초대를 받아 복숭아 밭, 딸기 밭을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2005년 5월 15일 스승의 날 아침. 장미꽃 가득히 담긴 꽃 소쿠리 하나를 배달 받았다. 서울서 회사를 경영한다는 내가 처음 맡았던 이인희 제자가 보낸 것이다. 가슴이 벅차면서 눈물이 났다. 못난 나를 그래도 기억해 주는 제자가 있다는 것에 또 한번 지난 날에 보람을 느낀다.
 사람과의 인연으로 말하자면 첫 사랑과도 같았던 그 아이들과의 만남. 내가 학교 문을 들어서면서 처음 만났던 그들. 출석부 스물 개까지 외우고 있었는데 50년 세월에 출석부의 기억도 희미하다.
“아직도 나를 기억해 주고 제자들아 나도 가끔씩 너희들을 생각한단다.”
 가끔 길에서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발을 멈춘다. 그 옛날 어린 소녀, 소년이 같이 늙어면서 나를 부른다. 가끔은 차를 타고 학교 앞을 지날 때가 있다. 50년도 더 지난 세월에 학교 모습도 많이 변했다. 그 곱든 탱자나무 울타리도 없어졌다. 학교 건물도 달라졌다. 교장 사택도 허물어져 없어졌다. 넓던 운동장도 작아 보인다.
“철 없던 너희들도 환갑을 지나 머리도 희긋희긋 하겠구나. 인희야, 상준아, 파일아, 청자야 그리고 말남아! 모두들 건강하게 잘들 지내려무나. 나는 그리워한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고 내 버팀목이었던 오빠도 내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