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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5-29 20:06
김해여성회관 10년 세월과 함께
 글쓴이 : 변진수
조회 : 2,967  

             
                                                 

 나는 여느 부인네들과 다름없는 집안에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집안살림 알뜰히 하고 의사인 남편을 둔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학벌과 재주와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던 어느날(1968.3) 뜻하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적십자 김해군 부녀봉사회(그당시 김해시가 없었을때)가 조직이 되면서 그 회장이 되었다. 적십자는 국제적인 기구로서 인도주의 사업을 하는 것으로 밖에 몰랐었다.
 적십자 활동을 어찌해야 되는지 무지한 상황에서 타의에 의해 회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김해 사회에서도 적십자에 대한 상식도 인식도 없던 때라 완전 무에서 시작이 되었다. 회원 한 명 없는 회장이 되어 어디서 무엇을 먼저 시작을 해야 할 지 난감했다.
 적십자본부에서는 연말봉사 중추절 봉사, 불우이웃돕기, 극빈산모구호, 고아원방문, 교도소방문 등 심심치 않게 공문이 날라왔다. 답답하고 기가 막힌 나는 친한 사이로 보람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급한대로 거기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집집마다 돈과 쌀을 거두어 한 가마 넘게 시루떡을 쪄서 각 고아원(그 당시는 김해군내에 고아원이 많이 있었다.) 인원수에 따라 나누어 주곤 하였다. 김해 교도소의 수감자들에게 생일잔치도 해주고 선물도 하였다. 보람회 회원들을 봉사회원으로 가입시켜 지금의 부녀 봉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한 해 두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 둘 회원이 불어났으나 월례회를 회장집 안방에서 하게 되니, 한달 두 달 하고 말 월례회도 아닌데 가정집에서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월례회과 회비 걷는 잡담장소에 불과해서 따로 장소가 있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봉사를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고 보람되고 신이 났다. 봉사가 나의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다. 이왕 회장 노릇을 할려면 똑똑히 잘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첫째는 남의 지탄받을 짓은 아니하고 모범이 되며 둘째, 불우한 이웃을 돕고 부녀자들을 위하는 사업을 해보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능력이란 차근차근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일을 했다.
 1975년에는 부녀자들을 위하는 부녀상담소를 설치하였다. 김해 원불교교당의 양해를 얻어 적십자봉사회 월례회 장소로 사용하고, 부녀상담소 상담역도 교무님에게 의뢰하였다. 그 당시 미혼모상담과 입양 알선은 김해군청 부녀 아동계와 연결시켜 처리하고 극빈산모구호, 직업알선, 파출부알선, 기타봉사활동은 부녀상담소와 적십자 부녀봉사회와 연관시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봉사하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일하다 보니 활동 범위도 넓어지고, 우리가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장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봉사란 말하기는 쉬우나 진실된 봉사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희생이 따라야 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을 내가 손해 본다는 마음이 없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해야하며 명예나 공명심의 관계없이 꾸준히 지속적으로 사심없이 봉사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나에게 돌아오는 보람도 있는 것이었다.
 첫째 편하고 기쁘고 평화스런 마음이 생기니 표정이 밝아지고
 둘째,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닌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셋째, 바쁘게 남이 안하는 일을 하니 더욱 부지런해지고, 넷째,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일에 대한 추진력과 자신감이 생기니 그 이상 더 큰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주는 상보다 내 자신이 일하므로 얻어지는 기쁨과 행복감, 이러한 것이 가정의 평화에도 이어지고 자녀교육과 장차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1974년 뜻을 같이하는 노차남, 최차금, 차현덕, 박복희, 김태연 제氏와 나는 우리도 무슨 보람된 일을 해보자, 일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경제적인 기반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50만 원짜리 계를 시작하였다. 이 돈이 오늘날 여성회관건립의 기초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었다. 2차로 시작한 것이 김해 여성들에게 1인당 5만원 24개월짜리 농협적금을 불입하여 여성 활동 기금으로 희사하는 조건으로 26명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24개월분 132만원과 그 이자를 합하니 2백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이리하여 조금씩 돈이 불어남에 따라 우리들의 꿈도 같이 커갔다. 이 돈을 잘 관리하고 더욱 노력하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성활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김해 소도시에 우리 여성들의 힘으로, 여성들의 집을 이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힘을 합쳐 회관건립을 해 보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긴다면 여성단체들의 월례회도,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안노인들의 휴식처도, 어린들을 돌볼 수 있는 유치원(탁아소)도, 여성교육을 위한 강좌도, 취미교실도, 직업알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흥분되었다.
  몇몇 동지들에게 이러한 뜻과 취지를 말하고 우리들이 힘을 합한다면 안될 일이 없다고 설득시켰다. 뭉치면 된다는 신념으로 발기하여 우리가 남만 믿고 일할 수 없다.
 첫째, 우리가 우리를 시험해 보자고 하여 우리가 남보다 먼저 돈을 내보자고 합의하여 돈을 내니, 자체 내에서 천만 원이 모였다. 기금모아 놓은 것과 이자 돈을 합하니 수월치 않은 돈이 되었다. 그렇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1979년 초부터 여성회관건립 취지문을 작성하여 지방유지와 여성들에게 우리의 뜻과 여성 전당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면서 모금을 시작하였다. 우리 몇몇 창립멤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이 일에 전념하였다. 날이 새면 오늘은 누구에게 찾아갈까 내일은 어느 집을 방문하고 이해시키고 협찬을 구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김해 뿐 아니라 부산에도 가고, 심지어 서울까지도 가고 때로는 발이 부르트기도 하고 발이 아파 구도를 벗어들고 맨발로 걷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우리 전당 마련의 꿈에 부풀어 열심히 뛰었다. 그 당시 여성회관 건립하는데 불이 붙었다. 나이 많은 노인들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자기네들이 10만원 5만원씩 모아 보태주었다. 갑계, 친육계, 동단위 새마을부녀회등 자기네들이 자진해서 가지고 왔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러나 어떤 때는 남의 집에 가니 주인은 안나오고 개만 짖어대어 헛걸음한 일, 돈 얻으러 왔다 싶어 반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실망감, 너희 여자들이 하긴 무얼 하느냐며 협찬 안하는 사람일수록 좋은 말 아니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모욕감, 허탈감, 실망을 가슴속 깊숙이 삭혀가며 모아진 돈이 기금, 이자 합하여 5천만 원이란 거액이 되었다. ( 그 당시 회관 건축비가 1억 2천만 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금에도 한계가 있고 건축비는 절반도 안되었다. 도비 보조를 2차에 걸쳐 신청하였으나 안되었다. 도청신축과 경남도 체전 등으로 돈이 없다고 기각되었다.
 우리 여성들의 힘으로 여성회관을 건립하다는 것은 너무나 벅찬 사업이었다. 하기는 해야겠고 답답해서 궁여지책으로 그 당시 서정화씨(현 국회의원)가 내무부장관으로 재임하고 있었을 때, 최 차금씨와 같이 81. 10.29 용산 자택으로 찾아갔다. 우리의 딱한 사정을 들은 장관께서 내 돈을 내어가며 봉사하겠다고 5천만 원이란 돈도 확보가 되고 대지 300평(시유지) 도 있는데 이런 일은 도와주어야 할 일이라며 흔쾌히 경남도를 통해 5천만 원의 보조금을 내려 보내 주었다.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당시 문백 김해시장님은 수고 많이 했다는 치하와 함께 바로 설계에 부치고 대저토건과 82. 1. 6 수의계약을 맺었다. 김해시에서는 유아원 설립할 2천만원을 회관 걸립에 보태서 아래층은 새마을 유아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건축비 1억 2천만원이 충당되었다. 82. 1. 6 수의계약과 함께 기공식을 가졌다. 5개월만인 1982년 5월 22일 대지 300평에 건평 210평의 여성회관이 탄생되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감격적인 순간이었던가.!
 그 날은 우리 여성들의 축제의 날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뜻하지 않은 여성회관 관장이 되었다. 집짓기 전에는 회관 짓는데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없이 뛰었지만 회관이 기공되고 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보니 더욱 더 걱정이었다. 내가 사무직이나 공직생활을 해본 경험도 없고 사회봉사를 열심히 성의껏 하기는 했지만 여성회관 관장을 어찌해야 잘 하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1층 새마을 유아원 원장도(8년 재직)겸하였다. 유아원은 운영비가 나와서 교사 봉급도 주고 운영을 하였지만 회관운영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리하여 여성회관 후원단체인 여성복지회를 조직하였다. 그동안 초대 박복희 회장, 2대 차현덕 회장이 맡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직원 봉급을 지원해준 회원 여러분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운영을 위하여서는 약간의 임대료와 수익성 있는 사업을 해야 했다. 아무리 수입이 필요하다 하여도 사회 유익을 주는 사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동안 해마다 5월 8일 어버이날에 필요한 무궁화꽃(카네이션보다 우리나라꽃을 장려하는 뜻에서)을 한 해에 6천 송이씩 손가락이 헤어지도록 만들어 각 중. 고등학교에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회관 운영에 보태기도 했다.
  그 당시 꽃 제작에 협력하여 준 적십자봉사회 신은숙 회장 및 회원과 김만희 총무,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또 인간문화재 초청 국악공연 공옥진 병신춤 공연도 하였다.
 여성회관 설립 취지와 정신은 의타적이 아닌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문백 시장님과 의논하여 재산상으로는 여성회관을 김해시에 기부채납을 하나 운영권이나 인사권이나 사용권은 자율에 맡긴다는 조건으로 증여증서 2통을 작성하여 1통씩 갖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힘으로 어려운 일들을 문백 시장님이 힘이 되어주고 도와 주셔서 우리들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색시 살림 장만하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냉장고, 피아노, 커텐, 의자, 응접 셋트, 테이블 등을 들여 놓게 되었다. 정원에도 나무를 심고 가꾸고, 풀 뽑아 나무 크는 연륜과 함께 우리 회관도 자리가 잡혔다.
  10년 동안 13회에 걸친 여성대학, 할머니 학교(9회 졸업), 한글학교, 어린이 여름 공부방 등 교육 사업과 꽃꽂이, 홈패션, 수족침, 난 강습 등 취미교실과 파출부 알선(무료) 그리고 김해시내 중. 고등학교 학생 154명에게 6년 동안 2천 오십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또한 근로 청소년을 위한 바자회 등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관리 운영했다. 바자회 이익금 3백만 원은 90. 12 시장학회에 희사하였다.
 앞으로는 나는 머지않은 날에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다. 단순한 여성 활동에 앞서 여성운동의 장으로 더욱 발전하여 이 나라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어 화합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관계가 이루어지기 바란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가장 슬픈 비극은 분열이다. 나라 일에서부터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갈라지면 힘이 없고 되는 일이 없다. 정의로움을 바탕으로 한 꺼풀씩 벗어나는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하여야겠다.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비굴하며 남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는 않는 가 되돌아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싯귀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