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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7-18 20:29
변진수 고문님의 회고사 -여성회관의 자율성을 지키는 외로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366  
여성회관의 자율성을 지키는 외로움
 - 김해여성복지회관은 전국유일하게 여성이 지은 여성회관이다-
                                          변진수 (초대 여성복지회관장)

■김해에 여성회관을 지으려는 꿈

  처녀시절 배화고녀를 졸업하고 얼마간의 교직을 끝으로 김해 가락의 문씨 가문 장손부가 된 나는 40이 넘도록 농사일과 육아 그리고 시부모 수발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한번도 안해 본 농사일을 다만 이곳이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자존심 때문에 열심히 해서 상일꾼 소릴 듣게 되고 그러다보니 시어른의 돈독한 신뢰를 얻어낸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발전하는 사회와 단절되는 소외감과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침 김해에 적십자부녀봉사회가 생기고 내가 회장을 맡아 사회봉사에 눈뜨게 된 계기로 나는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때 막연하게나마 여성이 자녀교육을 잘하고 가족과 화합하며 남은 여력과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내 가족 외의 이웃을 위하고 여권신장에 기여하며 자주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그렇게 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은 잠시도 사라지지 않고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몇 뜻이 같은 여성들과 의논하고 계획하며 고민을 하였다.
  나는 그동안 여자라고 울안에 붙잡혀 지낸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었다. 나 자신부터 갈고 닦아 발전시키고 여성들의 힘을 합하면 무언가 우리 지역에 공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아무리 절실해도 실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일을 하는 데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72년 5월부터 26명이 모여 계를 하며 계금으로 적금을 부어 나갔다. 기금이 불어남에 따라 무언가 의미있는 일이란 막연한 계획은 아주 구체적이 되어 우리 지역에 여성회관을 건립하는 일에까지 이어졌다. 여성이 함께 모여 놀고 공부도 하고 좋은 일의 의논도 하는 곳에 대한 기대와 욕구는 당시 우리 모두에게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려면 첫째 여성의 뜻이 합쳐지고 희망의 불이 붙도록 앞장 서는 사람과 이 일에 동참하는 동지와 이 일을 환영하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원불교 교당에 나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였다. 김해여성들의 의식고양과 지위향상을 위해 구심점 역할을 해줄 여성회관 마련에 내 작은 힘과 꿈이 씨가 되고 밑거름이 되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나의 이런 개성을 하늘이 알아주고 감응하리라는 신념으로 지성으로 합장을 하였다. 또 그런 몸과 마음과 정성으로 이 일에 앞장섰다. 내가 끝내 하고 싶었고 해야 할 일이라는 신념으로 진날 마른날은 가리지 않고 눈만 뜨면 이 일에 몰두하여 동분서주 하였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 그런지 하나도 힘든 줄도 몰랐다.

■10년 만의 준공식 - 그러나 권력에 빼앗긴 잔칫날

  계돈이 어느 정도 모이고 회관 건립이 눈앞에 보이자 나는 신이 나서 매일 매일 회관건립의 협찬후원자를 찾아 발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때만 해도 젊었으니 잘도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김해 여성 및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회관건립의 뜻을 세운지 10년만인 1982년 5월 26일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있었을까. 일이 어려울수록 보람도 큰 법이다. 준공식날 식사에서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김해여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말할 때의 복 받쳐오던 감격과 기쁨과 오만가지 설움을 억누를 수가 없어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준공식이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준공식을 그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바뀌어 이런 얘기라도 남길 수 있지만 그저 회환만 남던 그 준공식 날, 내 눈물은 온갖 감정이 폭포처럼 내 가슴을 치고 흐르며 만든 물줄기였다. 준공식을 준비할 때는 정말 신이 났었다. 손님들에게 드릴 쟁반 700개를 준비하고 잔치 떡쌀도 한 가마를 물에 담가 불려 놓았다. 김이 뭉개뭉개  나는 붉은 팥 시루떡을 해서 막걸리와 안주를 장만하여 김해사람을 다 불러다가 차일 치고 꽹가리를 치며 여성회관 마당에서(당시는 주변에 집도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잔치를 열 생각이었다. 그간 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녔던 여성 회원들이나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이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회관을 이룬 기쁨을 나눌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여성회관 준공식에 당시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참석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회관에 초비상이 걸리더니 회관 안과 밖을 샅샅이 조사하고 준공식날 아침에는 영부인용 탁자 의자 휴지통까지 싣고 와서 식장을 제 마음대로 장치를 하였다.
  말 한마디 않고 갑자기 주인에서 구경꾼이 되어버린 우리는 참석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한다는 말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일을 하늘 높게 쳐 놓고 시루떡과 막걸리를 우리의 고생과 보람을 자축하려던 꿈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와그르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분들이야 선의로 이런 곳의 준공식까지 참석해 축하해 주려 했겠지만 결과는 우리의 잔치판마저 빼앗아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민간단체에서 더구나 여성들의 힘으로 회관건립을 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준공식이 그분들의 관심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힘있는 자들의 막무가내식의 선의(?)는 그동안 이 일에 참여해서 모금에 애썼거나 작은 돈이나 많은 돈을 기꺼이 희사한 젊은이에서부터 나이 많은 할머니까지, 새마을 각 리와 동의 부녀회원 친목계 갑계 등 회관건립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과의 신바람 나는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준공식 날 멋모르고 잔치판에 모여든 많은 여성들을 검열관이 앉아 모두 돌려보내고 들어가는 50명도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라 하니 기뻐야할 잔치판이 그만 살벌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잔치에 분탕을 치고도 온다던 영부인은 기상관계로 참석을 못하고 준공식만 망쳐버린 것이다. 잔치판에 왔다가 쫓겨 간 여성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모욕을 당했다고 분해하고 울고불고 야단이 났다. 김해시내가 여성들의 분노로 발칵 뒤집힌 듯 했다. “여성회관이 집을 짓고 나더니 높은 사람만 상대하고 보통사람은 상대를 안 한다” 는 둥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참으로 미안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사정이야기를 해도 들어주거나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간의 어려움을 함께 겪고 회관건립을 자기 일처럼 여긴 김해 여성일수록 그 배반감은 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찌 그 시절에 우리가 우리의 잔치판을 지켜낼 용기나 깨우침이 있었겠는가? 속수무책, 지금도 할 말이 없다.
  며칠 후 시루떡을 한가마 찌고 여성들을 회관에 불러 잔치를 다시 벌이고 문백 시장과 내가 경위를 설명하며 사과를 하고 위로와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여간 가슴이 아프지 않다.

■자립적인 회관운영이 시청의 미움을 사고

  산을 넘으면 또 산이 기다린다고 집짓기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회관을 운영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회관 건물이 여성복지를 향상시키거나 여성을 위한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회관을 관리 운영할 사람과 경비가 필요했고 늘 작고 큰 비품구입 비용의 필요도 따라다녔다. 회관운영 재정의 뒷받침이 절실했다.
  궁리 끝에 여성회관 후원단체인 여성복지회를 조직하고 다소의 기금(오백만원)을 마련했다. 당시 회원은 25명이었고 박복희씨가 초대회장이 되었다. 여성복지회 회칙도 마련하고 매월 월례회를 8일에 갖기로 해서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수예품을 만들고 어버이날 무궁화꽃을 만들어 팔고 그림과 서예품, 자수, 홈패션, 음식을 만들어 자선바자회를 열며 수익사업도 부지런히 하였다. 어려운 청소년들의 학비를 돕기 위해 회원중 뜻있는 여성들이 주머니 끈을 풀어 7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당시로선 적잖은 액수의 300만원이란 장학금을 만들어 시의 장학회에 희사하기도 했다. 6년 동안 5월 8일을 위해 몇 달 전부터 무궁화 꽃을 손가락이 헤지게 만들어 각급학교에 판매한 이익금이 회관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시나 힘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가 자립적으로 운영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무언가 하나가 이루어지는 기쁨과 성취감과 보람 때문에 내 집일보다 회관 일에 더욱 애착을 느꼈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그리고 내 돈이 들어가기만 하는 일에도 언제나 신이 나서 열중했던 지난날, 한해 한해 연륜이 쌓이며 우리가 처음 회관 뜰에 심었던 작은 은행나무나 메다스키아는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났다.
  그러나 누가 호사다마라 했던가. 매년 개최하던 여성대학에 뒤탈이 생긴 것이다. 김해여성대학은 여성회관이 일반여성의 교양과 능력향상을 꾀하고자 만든 여성사회교육의 장이다. 좋은 일을 하려는 데도 김해시는 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면 방해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 모두가 당시 정통성 없는 정권 유지에 도움이 안될 것 같으면 과민반응을 보이고 알아서 기던 공무원들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아무리 억울해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14회째 개강예정이 4개월 기간의 (1990.3.7~90.6.28) 김해여성 대학에 야심적인 기획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명망가 위주의 강연위주 여성대학 강의가 여성의 삶을 개혁하거나 진취적인 여성상을 만드는데 미흡했다는 자체평가의 인식 위에서 이번에는 젊고 진보적인 지역 교수들을 초빙하고 여성학과 사회학 향토사를 중심으로 여성 삶을 반성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설계하게 하는 내실 있는 교육을 할 참이었다. 그리하여 교육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그 기간이라도 지역사회현실을 알고 사회 참여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현장교육과 토론교육, 자치교육을 해볼 예정이었다.
  마침 그런 일을 맡아 줄 자원 봉사자도 확보가 되었으니 관장인 나의 기쁨과 소망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 교육에 참여한 교육생들이 여성회관의 회원이나 일꾼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 여성회관의 중흥기를 열어볼 계획도 있었다. 더구나 그런 일을 해줄 적당한 사람도 하나 있었다. 여성회관은 그간 뜻이 있어도 전문인력을 수용할 비용이 없었기에 그런 기획을 하고 추진할 일꾼이 없었다. 복지회원들은 대략 나이가 많은 주부들이었고 복지회관의 실질적인 일꾼인 김만희씨는 취미교실 운영과 다른 사무로도 힘이 벅찰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이 지역에서 열심히 여성문제에 천착하는 여성주의 문학을 하는 시인 장정임씨가 마침 의욕적으로 그 일에 봉사하겠다 하여 나와 함께 교육기획을 하고 강사진 섭외, 수강생모집까지 모두 마쳐서 대략 90여명에 이르는 수강신청을 받아놓고 강의실을 준비하던 차에 일이 터진 것이다.
  장씨가 교원노조문제로 해직된 교사경력이 있기에 그가 일하는 김해여성대학은 열릴 수 없다는 것이 김해시의 견해였다. 나는 이 교육과정에 장씨가 강사로 있는 것도 아니고 실무자로 봉사하는 자원봉사자인데 전교조경력이 그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장씨도 해직이 되지 않았다면 여성회관 자원봉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전교조 일을 두고 이 일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내 생각엔 전교조 가입 전력과 상관없는 일에 전력을 거론하는 것도 이상하고 또 전교조가입이 무슨 대역죄를 진 일도 아닌데 개인을 따라다니며 일을 방해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여성대학의 책임자는 엄연히 관장인 변진수이고 내가 허수아비가 아닌한 장씨가 관이 염려하는 의식화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런 염려를 했다 해도 관이 있지도 않은 일을 염려로 회관 운영을 방해하고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관의 압력에 맞섰고 그것은 책임 있는 공인으로서 우리 회관의 자율성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또 관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개인적 자존심이기도 했다.
  어쨌건 김해여성대학은 관의 집요한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우리 회관이 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자율적으로 활동해 왔기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결국 우리의 자율이란 관의 손바닥 위에서의 자율이었던가 하는 자괴감도 생겼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여성회관과 시장과의 관계는 너무나 불편해졌다. 변 여사가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떠들던 그들이 갑자기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나를 배척하였다. 그들에게 자신의 말을 잘 안 듣고 굽신거리지 않는 삶은 제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모든 시의 여성행사에 내가 소외되고 다른 회원과의 이간질이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방해가 따라다녔다.
  그해 처음으로 송은복 시장이 부임하여 여성회관에 60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생색을 내더니 이 일을 계기로 그 돈은 구경도 시키지 않고 김해시에서 직접 여성대학이라 하여 강사를 초빙하고 강연회를 열어 그 돈을 써버리는 모양이었다. 600만원이란 돈도 그게 어디 개인의 돈인가? 국민의 혈세로 급조행사를 하는 것도 속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일이다.
  평생을 지역봉사에 헌신한다고 해온 명색 지역의 여성계 대표를 제 뜻과 다르다고 시장이나 공무원이 뒷전에서 함부로 대하는 모양도 참으로 예의가 아니었다. 자기보신 밖에 모르니 그렇다고 이해를 해버렸지만 나는 그 일로 많은 진실에 눈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도 좀더 사려가 깊고 진정한 자존심이 있거나 공부하는 공무원이었다면 이런 부작용을 긁어서 만들만큼 어리석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가슴 아팠고 섭섭하고 슬픈 일은 여성단체(당시 내가 김해여성단체 협회장이었다)나 여성끼리의 분열이었다. 관변단체와 그 회원들은 나와 시청과의 사이가 악화되자 등을 돌려버렸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단체며 무엇을 위한 여성활동이었단 말인가? 동원 존재이유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간의 허무한 유대와 믿음에 대해 허무감을 느꼈다. 김해여성들은 분열 없이 봉사활동을 잘한다고 각계에서 인정을 받아 왔었는데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볼 생각 없이 제 이익을 위해 관에 맹종하며 나를 비난하는 일부 여성회원들의 배반은 나를 비애와 고통과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는 내색할 수도 없이 혼자였다.
  관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하려했던 진실을 이해하고 지키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다.
  정도를 걸음에 있어 이해타산이란 얼마나 자주 닥쳐오던 유혹인가. 나는 바르게 사셔서 오늘날 자녀들을 자랑스럽게 하는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여성들이 자체모금으로 회관을 지어 시에 기부체납을 하는 조건으로 자율적 운영의 권리를 갖겠다고 했던 증서를 우리는 갖고 있는데도 시장이 그런 사실도 모르고 다른 시도의 관이 운영하는 여성회관처럼 관리하려 했던 데서 또 그런 권리를 헌신짝처럼 생각했던 일부 여성들 때문에 이번일은 더욱 비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전국에 유일한, 거시적인 여성들의 힘으로 지은 여성회관의 자율성을 여성들이 지켜내지 못하는 것은 여성들의 직무유기임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우리 여성회관이 열려던 여성대학엔 추호의 사악한 욕심이나 의도도 없었다. 오직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 교육, 여성이 자신의 힘을 느끼는 교육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여성회관이 누구에게도 자율성을 침해당하지 않는 단체로 떳떳하게 일하겠다는 것이 왜 잘못이며 비난을 당 할 일인가? 일부 회원들은 관에 고분고분 따르고 말을 잘 들으면 보조금을 받아 고생을 안하고 살 수 있는데 왜 고집을 부리느냐고 한다. 그것도 뭘 모르는 말이다. 선거 때마다 시키는 대로 했다면 회관의 체통이 어찌 되었겠는가. 일도 없는데 여성대학을 우리 마음대로 한다니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미끼를 던져본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런 도움 없어도 나름대로 잘 꾸려왔다. 그것은 우리의 당당한 자존심이기도 하다.
  1990년 9월 25일. 김해시로부터 여성회관 운영조례가 왔다. 이 운영조례에 관장은 시장이 위촉하고 지도감독을 받아야 하며 중요사업도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시설관리나 사용료를 받을 경우 시금고에 납입하고 시장이 수시로 여성회관을 지도감독 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성회관측은 1982년 김해시와 약정한 회관건물 증여증서에 의거 「회관운영의 자율권과 여성회관장은 내부규약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출/역선출 한다」라고 되어 있어 시와의 약정위반은 시측이 원인이므로 시의 운영조례에 따를 수 없다는 회신을 내용증명으로 우송하였다.
  수차 사회과장(김평구와 시장 송은복)이 운영조례에 응하길 요구했지만 우리 창립회원 6명은 끝내 거절하였고 지금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곳을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여성 활동의 장으로 궂게 지키고 발전시키고 싶다.
  이런 몸살을 치르는 중에 나는 관장 직에서 물러나 후원회의 일을 하고 있다. 여성회관도 이제 아픔과 괴로움을 딛고 새로 선출된 관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므로 이런 일을 겪은 여성회관이 김해여성사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세월이 흘러 몇 해가 지나갔지만 시청과의 껄끄러움은 여전하다. 언제까지 그들은 우리의 굴복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 독특하고 자생적이며 자율적인 여성회관을 관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협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여성단체 위에 군림하려는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인 시각을 벗고 서로 돕고 키우는 동반자적 관계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서로의 의견을 깊이 있게 듣고 수용하며 화합된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한 김해시의 참된 여성단체지원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진 세상이니 김해시도 여성 회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처럼 뜻 깊고 자생적인 여성회관은 전국적으로도 귀한 것이다. 김해여성의 능력이 돋보이는 이 여성회관과 여성단체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일은 더욱 성숙한 관의 모습일 터인데 관의 그 누구도 그 점을 이해하는 것 같지가 않아 못내 서운하기도 하다.
  획일이 아닌 다양함, 관리가 아닌 지원과 배려가 너무도 아쉽다. 내 반평생의 정열을 쏟아 부었던 곳, 몇몇 김해여성이 발이 부르트도록 노력해서 지었던 여성회관이 김해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더욱 발전하기를 기도할 뿐이다.